
1. 들어가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사람들
조선시대 내시는 궁중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는 특수한 존재였다. 궁녀와 달리 여인과 혼인할 수 있었고,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다만 내시는 생식 능력을 잃은 몸이었기 때문에 직접 자식을 낳을 수는 없었고,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내시의 아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분명 ‘아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일반적인 부부 관계와 가문 계승의 질서 안에서는 애매한 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있으나 부부의 정을 온전히 나누기 어렵고, 가문 안에 있으나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역할을 기대받기 어려운 존재. 내시의 아내는 조선 사회의 가족 질서 안에서 쉽게 설명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시의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다. 역사는 대체로 왕과 관료, 제도와 사건을 기록했지, 그 제도 안에서 조용히 살아야 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의 내면까지 세세하게 남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후기 야담집에는 내시의 여인을 다룬 흥미로운 이야기가 두 편 전한다. 『이순록』 제239화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와 『잡기고담』 상권 제5화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이다.
두 이야기는 모두 내시와 관계된 여성을 다룬다. 하지만 그녀를 그리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의 여성은 타인이 설계한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반면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의 여성은 스스로 담을 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직접 정한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읽어보려 한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자기 삶을 말하는가. 누가 끝내 침묵한 채 타인의 이야기 속에 놓이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두 이야기가 단지 ‘내시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보인다. 이 이야기들은 내시의 아내라는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시 자신의 결핍과 쓸쓸함까지 함께 드러낸다.
2. 두 이야기 줄거리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두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
과천에 사는 젊고 부유한 환관 김창의는 하인들을 시켜 길을 지나던 한 영남 선비를 억지로 붙잡아 집으로 데려온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선비는 김창의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다 밤이 되자 곱게 꾸민 여인과 한 방에 갇힌다. 여인은 선비에게 이상한 조건을 내건다. 자기 배 위에 올라타서 소 울음소리를 크게 내야만 몸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선비는 처음에는 부끄러워 거절하지만, 결국 그녀가 시키는 대로 소 울음소리를 내며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이후 김창의는 과거 시험을 앞둔 선비에게 노잣돈과 시험 도구를 마련해 준다. 심지어 궁궐 안 인맥까지 동원해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도록 돕는다. 급제한 선비가 인사를 하러 다시 찾아오자, 김창의는 그제야 사정을 밝힌다. 그 여인은 원래 양갓집 딸이었으나,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김창의가 데려와 살게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황소가 배 위에 올라탔다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김창의는 그것을 “아들을 낳고 과거에 급제할 꿈”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자신은 거세된 몸이라 그 일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선비를 데려와 그녀와 인연을 맺게 하고, 과거 급제까지 도운 것이다. 김창의는 여인을 선비에게 딸려 보낸다. 그리고 이후 스스로 그들과의 인연을 끊는다.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
충청도 구리내 마을에 사는 영감과 할멈의 집에, 한양에서 온 선비가 자주 묵어가며 친해진다. 어느 날 밤, 할멈은 선비에게 젊은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원래 서울 양갓집 딸이었다. 열여섯 살에 한 내시에게 시집을 갔지만, 남편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그녀의 몸을 만질 뿐이었고, 그녀는 해가 갈수록 이 결혼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결국 그녀는 재물과 옷가지를 챙겨 담을 넘어 도망친다. 정처 없이 길을 걷던 그녀는 “처음 만나는 남자를 따라가겠다”라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마침 마주친 젊은 승려의 뒤를 사흘 내내 따라간다. 승려가 지쳐 나무 그늘에서 쉬는 틈에, 그녀는 그를 붙잡아 관계를 맺고 “이제 우리는 부부”라며 그의 집으로 함께 간다. 가난한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그녀를 반기지 않지만, 그녀가 가져온 패물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그녀는 남편에게 새 옷을 지어 입혀 번듯한 신랑으로 꾸미고, 뒤쫓아와 행패를 부리는 승려의 스승까지 직접 뺨을 때려 쫓아낸다. 이후 두 사람은 그 마을에 정착해 50여 년간 농사를 짓고, 자식과 손자를 두며 살아간다.
3.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 타인의 계획 속에 놓인 여자

관찰자의 눈으로만 존재하는 여인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비의 시선을 따라간다. 길을 가던 선비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들어가고, 낯선 여인과 한 방에 갇히고, 기이한 조건을 수행하고, 이후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독자는 이 사건을 거의 선비의 입장에서 경험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야 할 여인은 이름조차 없다. 그녀는 그저 “여인”이며, “그 애”이며, 마지막에는 선비를 따라가는 짐 보따리와 함께 실려 가는 존재처럼 처리된다.
물론 그녀에게도 말과 행동은 있다. 소 울음소리를 요구하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장면 역시 그녀가 직접 만든 무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선비를 데려온 것도, 술상을 차린 것도, 방문을 잠근 것도, 사흘 뒤 그녀를 가마에 태워 선비에게 보낸 것도 모두 김창의다.
그녀는 대사를 가진 인물이지만, 자기 삶의 각본을 쓴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움직이고 말하지만, 그 움직임과 말은 이미 김창의가 짜놓은 판 안에서 이루어진다. 결정적인 장면은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나온다. 김창의는 그녀가 꾼 “황소가 배 위에 올라탔다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꿈”을 “아들을 낳고 과거에 급제하는 꿈”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한 개인의 삶이나 행복보다 출산과 출세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녀가 무엇을 원했는지, 그 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선비를 따라가는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꿈조차 그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김창의의 해석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끝내 자기 삶을 직접 설명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야기 속에 있지만, 자기 이야기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왕을 위해 남성성을 지운 자의 결핍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한 김창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이야기 마지막에서 김창의는 시 한 수를 남긴다.
만물은 다 음양을 갖추었거늘
나만 홀로 그렇지 못하구나
열여섯 살 규방의 여인이
석양에 꽃을 보고 눈물 흘리네
이 시에는 김창의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그는 부유하고, 힘이 있으며, 궁궐 안 인맥까지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선비를 과거에 급제시킬 만큼 현실적인 영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끝내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내와 몸을 나누는 일, 자식을 낳는 일, 한 여성과 부부로서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일이다.
내시는 왕의 곁에 있기 위해 거세라는 대가를 치른 존재다. 왕의 사적 공간에 드나들 수 있는 남성이 되기 위해, 그는 남성성을 잃어야 했다. 그 대가로 권력과 부를 얻었지만, 동시에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상실도 안게 되었다.
그가 선비를 데려와 벌인 이 기이한 일은 표면적으로는 선의처럼 보인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을 더 나은 조건의 남자에게 보내고, 선비에게도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김창의가 자기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타인의 몸을 빌려 대신 실현하려 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선비에게 맡긴다. 여성과의 결합, 자식을 낳을 가능성, 과거 급제라는 남성적 성공. 김창의는 그 모든 것을 직접 누리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판을 짜고 돕는 방식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훗날 급제한 선비가 다시 찾아왔을 때, 김창의가 스스로 인연을 끊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저는 내시이고 나리는 높은 관리이니 왕래를 끊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한다.
김창의는 선비를 도와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세계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성공이 이루어진 순간, 그는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할 수 없는 사람임을 더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내세워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여인과 선비의 삶 속에 자신을 남겨두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다.
이 단절은 신분과 체면의 문제이기도 하고,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기 결핍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 택한 쓸쓸한 퇴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이름 없는 여인의 소외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 여인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김창의 역시, 조선 사회의 질서 안에서 온전히 설명되지 못하는 결핍의 인물이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김창의는 자기 결핍을 말할 수 있지만, 여인은 자기 삶을 말하지 못한다.
웃음이 감추는 것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단연 소 울음소리다. 독자는 이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선비가 여인의 배 위에서 소 울음소리를 내야 한다는 설정은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다. 야담 특유의 해학이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이 웃음은 불편한 상황을 슬쩍 가려주는 역할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과 한 방에 갇힌 남자, 타인이 설계한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여인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몸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바깥에서 조종하는 김창의.
이 장면은 웃기지만, 동시에 상당히 위태롭다. 누군가의 욕망과 계획 속에서 두 사람이 관계를 맺게 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 울음소리라는 우스꽝스러운 장치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심각한 국면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웃음은 이야기를 가볍게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그 안에 있는 불편함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웃음은 통쾌함보다는 은폐에 가깝다. 여성이 타인의 계획 속에 놓인 불편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웃음이다.
4.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 담을 넘은 여자, 자기 삶을 말하는 여자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힘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은 첫 번째 이야기와 형식부터 다르다. 이 이야기는 등불 아래에서 할멈이 직접 들려주는 회고담이다. 그녀는 “나는 서울 양갓집에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담을 넘기 전 며칠 밤을 뒤척였던 마음, 남대문을 나설 때의 두려움, 동작나루를 건너며 했던 계산, 처음 만나는 남자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한 순간까지 모두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의 차이가 아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여인의 내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서술자도, 선비도, 심지어 그녀를 거두고 계획을 세운 김창의조차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녀는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야기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반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직접 자기 경험을 해석한다. “화려한 비단옷과 맛있는 음식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독백, 중을 따라가기로 마음먹는 과정, 시어머니를 설득하는 전략, 뒤쫓아온 승려의 스승을 내쫓는 장면까지 모두 그녀의 말속에서 살아난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내용만이 아니다. 누가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한쪽 여성은 이야기 속에서 말해지는 대상이다. 다른 한쪽 여성은 자기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주체다. 이 차이만으로도 두 여성의 위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주어진 신분이 아니라 만든 신분
두 이야기의 결말도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여인은 몰락한 양갓집 딸에서 급제한 선비의 여인(첩)으로 옮겨간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의 처지는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녀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김창의가 계획했고, 선비가 그 계획 안으로 들어왔으며, 그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그녀는 기존 질서 안으로 다시 편입된다. 과거 급제, 양반 남성, 가문, 출산의 가능성. 그녀의 삶은 조선 사회가 인정하는 질서 안에서 다시 배치된다.
반면 두 번째 이야기의 할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녀가 길에서 만난 남자는 이미 자리 잡은 양반도, 과거 급제를 앞둔 선비도 아니다. 사찰에 매인, 몸 하나뿐인 젊은 승려다. 그런데 그녀는 그 남자를 자기 삶의 동반자로 만든다. 그를 설득하고, 환속시키고, 새 옷을 지어 입혀 “어엿하고 젊고 멋있는 신랑”으로 꾸민다. 가난한 시어머니의 마음도 자신이 가져온 패물과 옷감으로 돌려놓는다. 뒤쫓아온 승려의 스승이 행패를 부리자, 직접 맞서 싸워 쫓아낸다. 그녀에게는 기존 질서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바깥에서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이야기의 여인이 타인이 마련한 신분 상승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이야기의 할멈은 자기 삶의 조건을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서두에는 영감이 “납속을 하여 당상관 직첩을 받아 옥관자에 사모관대를 한 양반”으로 주변 고을에서 어른 대접을 받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다시 말해, 젊은 시절 승려였던 남자는 이 여인을 만난 뒤 신분적으로도 상승한 셈이다.
물론 그 모든 변화가 전적으로 그녀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야기 안에서 삶의 방향을 밀고 나가는 힘은 분명 그녀에게 있다. 그녀는 주어진 신분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살 수 있는 자리를 직접 만들어낸다.
통쾌함과 불편함 사이
이 이야기에도 웃음이 있다. 승려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장면, 뒤쫓아온 승려의 스승에게 “빡빡 깎은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뺨을 때리는 장면은 매우 해학적이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당황하면서도 웃게 된다. 그런데 이 웃음이 향하는 방향은 첫 번째 이야기와 다르다.
앞의 이야기에서 웃음이 여성이 타인의 계획 속에 놓인 불편함을 덮는 데 쓰였다면, 여기서 웃음은 여성이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휘두르는 힘을 유쾌하게 드러낸다. 할멈은 얌전하거나 고분고분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계산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싸운다. 이야기의 웃음은 그런 그녀의 에너지를 부끄럽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부각한다.
다만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그녀가 승려를 사흘 동안 따라가고 결국 붙잡아 관계를 맺는 장면은 불편하게 읽힐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한 여성이 억압적인 결혼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지만, 그 탈출이 언제나 윤리적으로 매끄러운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인물을 단순히 ‘통쾌한 여성상’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그녀는 자기 삶을 차지하기 위해 당시의 질서와 충돌하는 인물이며, 그 과정에서 오늘의 독자가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거친 방식도 보여준다. 바로 그 복잡함 때문에 이 인물은 더 흥미롭다. 그녀는 착하고 모범적인 여성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기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를 듣던 영감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할망구”라며 역정을 낸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웃고 만다.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야기는 그녀의 행동을 완전히 점잖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끝내 그녀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뻔뻔함과 생명력을 웃음 속에서 받아들인다.
5. 두 이야기가 마주 보는 자리: 침묵하는 몸과 말하는 목소리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것은 같은 처지에 놓인 여성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한쪽에서 여성의 몸은 남편의 결핍과 남성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매개가 된다. 그녀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의 의미는 김창의가 해석한다. 그녀는 선비와 관계를 맺지만, 그 만남은 김창의가 설계한다. 그녀는 삶의 자리를 옮기지만, 그 이동 역시 김창의가 마련한 결과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 여성은 자기 몸과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내시의 집을 나오는 것도 그녀의 선택이고, 길에서 만난 남자를 따라가겠다고 정한 것도 그녀의 선택이다. 새 가정을 꾸리고, 남편을 새롭게 만들고,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과 맞서는 것도 그녀 자신이다.
이 차이는 사건의 내용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서술 방식에서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 첫 번째 여성은 말해지는 사람이다. 두 번째 여성은 말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이름 없이 이동하고, 다른 한 사람은 늙은 할멈이 되어 자기 삶을 직접 회고한다. 첫 번째 여성은 타인의 해석 속에 갇혀 있고, 두 번째 여성은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한다.
동시에 두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을 공유한다. 내시와 혼인한 여성은 조선 사회가 이상적으로 여긴 가족 질서의 바깥에 놓인 존재였다. 자식을 낳고, 가문을 잇고, 부부의 정을 나누는 관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세계에서 내시의 아내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그 사각지대에서 한 여성은 남이 설계한 행복을 받아들인다. 다른 여성은 담을 넘고, 자기 삶을 다시 만든다.
두 선택 모두 그 시대의 여성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여성의 침묵이 단순한 무기력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두 번째 여성의 선택이 단순한 해방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두 이야기는 분명히 보여준다. 누군가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고, 누군가는 자기 이야기를 직접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이다.
6. 나가며: 내시라는 결핍, 아내라는 사각지대
김창의의 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만물은 다 음양을 갖추었거늘, 나만 홀로 그렇지 못하구나.”
이 탄식은 내시의 결핍을 보여준다. 그는 권력 가까이에 있었지만, 평범한 부부의 삶에서는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그 결핍은 그의 곁에 있던 여성의 삶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왕을 위해 자기 몸의 일부를 지운 남자. 그 남자의 아내로 이름 없이 살아야 했던 여자.
〈자기 여자를 남과 맺어준 내시〉는 그 결핍을 채우려는 남자의 안간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인은 자기 목소리를 잃은 채 타인의 계획 속에 놓인다.
〈내시 아내가 승려를 만난 사연〉은 그 결핍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담을 넘은 여자를 보여준다. 그녀의 선택은 거칠고 불편한 면을 지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기 삶을 남의 해석에만 맡기지 않는다. 늙은 할멈이 된 그녀는 등불 아래에서 자기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역사는 내시의 아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야담이라는 헐거운 이야기의 틈새를 통해 우리는 이 여성들의 얼굴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한 명은 끝내 이름도 목소리도 남기지 못한다. 다른 한 명도 이름은 없지만, 자기 삶을 말하는 목소리를 얻는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두 이야기는 모두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사건을 다루지만, 그 웃음 뒤에는 조선 사회의 가족 질서 안에서 설명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내시라는 결핍, 아내라는 사각지대, 그리고 그 안에서 침묵하거나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
그래서 이 두 편의 야담은 단순한 기담이나 우스운 일화로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묻게 만든다.
누가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가.
나는 타인의 계획 속에 놓인 사람인가, 아니면 내 삶을 직접 말하는 사람인가.
오래된 야담 속 내시의 아내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을 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 텍스트 : 정환국 편역, 『조선의 단편2 』, 휴머니스트, 2023, pp.13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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